추운 겨울 냉면가게서 쓴 시로 신춘문예 등단···늦깎이 시인 맹재범 씨

입력 2024-04-04 15:42   수정 2024-04-05 09:39

시 ‘여기 있다’로 202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된 맹재범(46) 씨를 만났다. 그는 고등학교 때 우연히 시집을 읽고 시에 관심을 두게 됐다. 경희대학교 국문과에 진학한 그는 시창작동아리에 들어갔지만 시에 재능 있는 친구들을 보면서 한때 좌절하기도 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가업을 이어받아 15~16년 간 냉면 가게에서 일했다. 그런 와중에도 시는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5년 전 겨울,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한 그는 새벽 고속도로를 달리는 택배 차량, 밤과 새벽에 다음날 냉면을 준비하는 자신을 보며 이 세상 ‘투명인간’들을 위해 시 <여기 있다>를 썼다. ‘나이는 많지만 아직 신인’이라며 수줍은 듯 말하는 맹재범 시인을 3월 어느 날 신촌 독수리 다방에서 만났다.



시에 관심 가지기 시작한 건 언제였나.
고등학생 때다. 친구랑 교보문고 가서 김수영 시집을 받았다. <사령>이라는 시에 꽂혔다. 당시 교과서에 없던 시였다. 시집을 사서 읽었더니 교과서에 실린 시와 달랐다. 다른 시집도 사서 읽다가 시를 쓰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국문과로 대학을 진학했다.

대학생 때는 시 창작 활동을 했나.
1년에 한두 편 썼다.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하늘세제>라는 시 창작 동아리에 들어갔다. ‘하늘로 올라가는 언덕’이라는 뜻이다. 90년대 후반 동아리가 그렇듯, 술자리 위주였다. 동아리에서 놀기만 했다.
동시에 시 창작에 좌절했다. 어떤 걸 써야 하는지 몰랐다. 동아리, 국문과에 잘 쓰는 사람이 많았다. 20대에 등단한 사람도 있었다. 박준 시인, 박은지 시인, 방수진 시인과 학교를 다녔다. 시를 잘 쓰는데 더 열심히 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노력해야 시 쓰는 사람인데, (시인이) 내 길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졸업 이후 진로는 어떻게 흘러갔나.
대학을 졸업하고 잠시 언론사에 있다가 부모님이 하시는 냉면 가게를 하게 됐다. 15~16년 동안 어머니를 도우면서 식당에서 일했다. 주중에 평택 식당 숙직실에서 생활하고, 주말에 서울 집 올라왔다. 낮에 냉면 팔고, 저녁과 새벽에 일을 준비했다. 바쁘게 일하면서 자연스럽게 시를 안 쓰게 됐고, 쓸 여건이 안 된다고 생각하니까 시를 싫어하게 되었다.

다시 시를 쓰게 된 건 언제였나.
냉면 가게를 10년쯤 했을 때, 5년 전 겨울이다. 다음날이 마감인 신춘문예가 있어 냈더니 가슴 떨리고 좋았다. 그때부터 신춘문예에 다섯 번 냈다. 12월 초가 신춘문예 마감이다. 냉면 가게는 11월 중순부터 12월 초가 제일 한가하다. 그래서 한 달 동안 써서 냈다. ‘올해도 써야지’하는 생각으로 1년 삶을 정리하면서 시 썼다.
처음에는 당선 생각 않고 쓰려고 했다. 그런데 2~3년 쓰다가 당선에 집착하게 되더라. 당선작을 따라 하고, 젊은 시인들을 흉내 냈다. 그렇게 2년 정도 지나서 내가 쓴 글이 내가 쓴 글 같지 않고 어설펐다. 그때부터 마음을 내려놓았다. ‘앞으로도 신춘문예에 떨어진다. 매년 열편씩, 50편 써서 신춘문예 낙선자 시집을 내자’라고 생각했다.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됐을 때 어땠나.
당선 전화 받고 떨리지는 않았다. 당선에 기대를 버린 상태였고, 당선된 날 어머니와 작은 다툼이 있었기 때문이다. 방에 들어왔더니 부재중 통화가 있었다. 다시 전화했는데 안 받았다. 스팸전화인 줄 알았다. 다시 전화 와서 신문사라고 소개받았다. 나는 당선에 기대 없던 상태고, 어머니랑 다툼이 있던 상태라 기자님께 무뚝뚝하게 ‘네, 네’ 대답했다.

시인으로서 앞으로의 계획은.
시집을 내고 싶다. 시집 내는 건 시인들의 꿈이다. 올 1월에 냉면 가게 정리했다. 5년 전부터 지금까지 냉면 가게에서 시 썼다. 이제 내 시 소재가 어떻게 바뀔지 궁금하다. 나이가 있지만, 신인 작가다. 앞으로 기대도 걱정도 있다. 물론 걱정이 더 많아지고 있긴 하다. 그래도 잘 돼도 안 돼도 계속 시 쓸 것 같다.

여기 있다(2024 경향신문 시 부문 당선작) / 맹재범

접시와 접시 사이에 있다
식사와 잔반 사이에 있다
뒤꿈치와 바닥 사이에도 있는

나는 투명인간이다

앞치마와 고무장갑이 허공에서 움직이고
접시가 차곡차곡 쌓인다
물기를 털고 앞치마를 벗어두면 나는 사라진다
앞치마만 의자에 기대앉는다

나는 팔도 다리도 사라지고 빗방울처럼 볼록해진다
빗방울이 교회 첨탑을 지나는 순간 십자가가 커다랗게 부풀어 올랐다 쪼그라든다
오늘 당신의 잔고가 두둑해 보인다면 그 사이에 내가 있었다는 것, 착각이다
착각이 나를 지운다

빗방울이 바닥에 부딪혀 거리의 색을 바꿔놓을 때까지 사람들은 비가 오는지도 모른다
사무실 창문 밖 거리는 푸르고 흰 얼굴의 사람들은 푸르름과 잘 어울린다 불을 끄면 사라질지도 모르면서

오늘 유난히 창밖이 투명한 것 같아

커다란 고층빌딩 유리창에 맺혀 있다가 흘러내리는 물방울이 있었다

나는 도마였고 지게차였고 택배상자였다
투명해서 무엇이든 될 수 있지만 무엇이 없다면 아무것도 될 수 없다

밖으로 내몰린 투명인간들이
어디에나 있다 사람들은 분주히 주변을 지나친다
나를 통과하다 넘어져 뒤를 돌아보곤 다시 일어서는 사람도 있었다
너무 투명해서 당신의 눈빛을 되돌려줄 수 없지만

덜컥 적시며 쏟아지는 것이 있다

간판과 자동차와 책상과 당신의 어깨까지
모든 것을 적실 만큼
나는 여전히 여기에 있다


강홍민 기자 khm@hankyung.com
홍용민 대학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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